낡은 브라운관 앞, 찬란했던 우리들의 90년대

주윤발의 <도신-정전자> (1989): 올백 머리와 초콜릿, 낡은 자취방을 열광시킨 홍콩 도박 느와르의 신화

 

주윤발의 <도신-정전자> (1989): 올백 머리와 초콜릿, 낡은 자취방을 열광시킨 홍콩 도박 느와르의 신화
출처 : kmdb

1. 90년대 대학가, 비좁은 자취방을 장악한 '윤발이 형님'의 위엄

  • 낡은 브라운관 TV 앞, 이쑤시개 대신 초콜릿을 물던 청춘들 1994년대 초반, 대학교 다닐 때 두세 명이 누우면 발끝이 닿던 좁디좁은 자취방은 우리들의 완벽한 아지트였습니다. 주말이면 퀴퀴한 노란 장판 바닥에 엎드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드르륵' 소리가 나던 배불뚝이 브라운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주윤발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영웅본색>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동네 비디오 대여점을 강타한 <도신-정전자>는, 자취방에 모인 우리들이 이쑤시개 대신 싼 초콜릿을 입에 물고 트럼프 카드를 만지작거리게 만든 주범이었습니다.

  • 총격전에서 카지노 테이블로, 느와르의 무대가 바뀌다 기존의 홍콩 영화가 어두운 뒷골목과 피가 튀는 총격전에 집중했다면, 왕정 감독의 <도신>은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는 카지노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낡은 TV 화면 속에서 턱시도를 쫙 빼입고 등장한 주윤발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불투명한 현실 속에서 찌질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90년대 대학생들에게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자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2. 홍콩 도박(겜블) 느와르 장르의 화려한 서막

  • 총칼보다 날카로운 심리전과 타짜들의 세계 <도신>은 홍콩 영화사에 '도박 느와르' 혹은 '겜블 무비'라는 새로운 장르를 완벽하게 정립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피 튀기는 액션이 없어도,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트럼프 카드 한 장과 미세한 눈빛 교환만으로 엄청난 긴장감을 자아냈습니다.

  • 아시아 대중문화를 관통한 새로운 클리셰의 탄생 카드의 뒷면이나 점을 읽어내는 기술, 상대의 버릇을 파악해 심리를 역이용하는 두뇌 싸움 등은 이후 수많은 도박 영화들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가 극에 달했던 90년대 홍콩 사회의 황금만능주의를 배경으로, 돈과 배신이 얽힌 냉혹한 도박판의 생리는 당시 자취방에 앉아 있던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상의 짜릿함을 선사했습니다.

3. 올백 머리와 옥반지, 아시아를 강타한 주윤발 신드롬

  • 완벽하게 계산된 시각적 캐릭터의 승리 이 영화가 범아시아적인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윤발이 연기한 '고진(도신)'이라는 캐릭터의 독보적인 시각적 매력 때문입니다. 포마드를 잔뜩 발라 넘긴 완벽한 올백 머리,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묵직한 옥반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까먹는 명품 페도라(Feodora) 초콜릿은 도신의 상징 그 자체였습니다.

  • 자취방 바닥을 굴러다니던 트럼프 카드와 어설픈 흉내 영화를 본 다음 날이면, 학교 앞 술집이나 동아리방에서는 어설프게 머리를 뒤로 넘기고 카드를 셔플하는 친구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카드를 스르륵 미끄러뜨리며 승리를 확신하는 주윤발의 그 여유로운 미소는, 팍팍한 취업난과 학점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90년대 청춘들이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어른의 여유이자 '쿨함'의 결정체였습니다.

4. 기억상실증과 반전,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 서사 구조

  • 카리스마 넘치는 도신에서 어린아이 '초콜릿'으로의 추락 영화의 서사 구조 역시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탁월한 힘을 가졌습니다. 무적의 도박의 신이었던 고진이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10살짜리 지능을 가진 어린아이 '초콜릿'으로 전락하는 과정은 묘한 페이소스를 자아냅니다. 유덕화(도仔)를 만나 동네 도박판을 전전하며 구박을 받는 주윤발의 천연덕스러운 바보 연기는, 완벽해 보이던 영웅의 인간적인 빈틈을 보여주며 관객의 몰입도를 극대화했습니다.

  • 기억을 되찾은 영웅의 통쾌하고도 우아한 복수극 그리고 마침내 기억을 되찾은 고진이 자신을 배신한 이들을 향해 완벽한 판을 짜서 복수하는 마지막 카지노 씬의 카타르시스는 엄청났습니다. 잃었던 모든 것을 가장 우아하고 압도적인 방식으로 되찾는 영웅의 귀환은,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수십 번이나 되감아 보게 만들 정도로 짜릿한 쾌감을 안겨주었습니다.

5. 마무리 : 넷플릭스 시대에 다시 꺼내보는 낡은 비디오테이프의 감성

  • 4K 초고화질이 대체할 수 없는 거친 질감의 그리움 요즘은 넷플릭스나 스마트폰 클릭 한 번으로 언제든 선명한 4K 초고화질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편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화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해졌고 화면은 눈부시게 선명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비가 내리듯 지지직거리던 자취방의 낡은 배불뚝이 TV 화면과, 카드를 뒤집는 명장면을 보느라 테이프가 늘어지던 그 거친 화면의 질감이 몹시도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 초콜릿 하나에 행복했던 영원한 청춘의 시각적 일기장 우리가 그토록 주윤발과 <도신>에 열광했던 건, 단지 카지노의 화려함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친구들과 좁은 방바닥에 둘러앉아 슈퍼에서 산 싸구려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영웅을 흉내 내던 그 시절의 온도, 그리고 찌질하고 불안했지만 가장 순수하게 멋을 부리고 싶었던 우리들의 20대 시절이 그 거친 화면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90년대 대학생이었던 저에게 주윤발의 올백 머리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폼나게 살고 싶었던 청춘의 낭만을 일깨워주는 영원한 일기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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