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kmdb |
1. 90년대 대학가, 나 홀로 브라운관 앞에서 마주한 가장 현실적인 로맨스
수업이 없는 평일, 텅 빈 자취방의 고요함을 깨는 재생 버튼 왕가위의 몽환적인 밤거리를 헤매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또다시 수업이 없는 평일 오후가 찾아왔습니다. 왁자지껄하던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지고, 두세 명이 누우면 꽉 차던 좁디좁은 자취방에는 저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퀴퀴한 노란 장판 바닥에 편안하게 엎드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드르륵' 소리가 나던 배불뚝이 브라운관 TV에 <첨밀밀> 비디오테이프를 밀어 넣었습니다. 요란한 총소리나 무협의 기합 소리 대신, 테이프가 돌아가는 기계음만이 고요한 방 안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느와르의 환상을 거둬낸 자리에 찾아온 청춘의 자화상 화면 속에 등장한 건 선글라스를 낀 킬러나 세련된 홍콩의 멋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촌스러운 옷차림으로 홍콩역에 갓 도착한 어리숙한 소군(여명)과, 악착같이 돈을 벌어 성공하려는 이요(장만옥)의 모습은 이전의 홍콩 영화들이 주던 비현실적인 환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화려한 액션 대신, 타지에서 외롭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두 남녀의 팍팍한 일상은 좁은 방 안에서 홀로 화면을 응시하던 가난한 대학생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2. 홍콩 드림과 자본주의,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엇갈린 인연
돈과 성공을 쫓아 요동치던 90년대의 시대상 <첨밀밀>은 단순한 멜로 영화를 넘어,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젊은이들의 애환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식과 비디오 장사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요의 악착같은 모습은, 취업이라는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불안하게 흔들리던 우리 90년대 청춘들의 자화상과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던 비극적인 엇갈림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결국 각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엇갈림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영웅들의 비장한 죽음보다, 성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떠밀려가는 이들의 평범하고도 현실적인 이별이 수업 없는 평일 오후의 텅 빈 자취방 공기를 더욱 쓸쓸하고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3. 등려군의 목소리와 자전거 뒷자리, 90년대 청춘을 관통한 아련함
'월량대표아적심'이 흐르던 가장 낭만적인 자전거 데이트 이 영화가 아시아 전역의 청춘들에게 남긴 시각적, 청각적 충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비좁고 시끄러운 홍콩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여명이 모는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장만옥이 다리를 흔들며 앉아 등려군의 '첨밀밀(甜蜜蜜)'을 흥얼거리던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낭만의 결정체였습니다.
낡은 TV 스피커를 뚫고 나온 첫사랑의 기억 특히 두 사람의 마음이 맞닿을 때마다 낡은 TV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의 아련한 멜로디는, 혼자 엎드려 있던 제 가슴 한구석에 숨겨둔 풋풋한 낭만의 기억마저 조심스레 끄집어냈습니다. 화려한 외제 차나 오토바이가 없어도, 자전거 한 대와 따뜻한 등짝만으로도 완벽했던 그 시절의 순수한 로망이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4. 자취방 장판 위,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기적 같은 재회
뉴욕 한복판, 전광판 앞에서 멈춰 선 두 사람 영화의 결말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없이 엇갈리던 두 사람이 뉴욕의 어느 길거리 전자 대리점 앞에서 기적처럼 재회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입니다.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뉴스 전광판 앞에서 우연히 발걸음을 멈춘 소군과 이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짓는 순간,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자만의 고요함 속에서 삼킨 먹먹한 카타르시스 그 어떤 극적인 대사나 왈칵 쏟아내는 눈물 없이도,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는 그 잔잔한 미소 속에는 10년의 세월과 팍팍했던 삶의 회한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자취방에서 홀로 이 먹먹한 카타르시스를 삼키며, 언젠가 내 삶에도 저런 운명 같은 기적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습니다.
5. 마무리 : 넷플릭스 시대에 다시 꺼내보는 낡은 비디오테이프의 감성
4K 초고화질이 대체할 수 없는 거친 질감의 그리움 요즘은 넷플릭스나 스마트폰 클릭 한 번으로 언제든 선명한 4K 초고화질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편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화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해졌고 화면은 눈부시게 선명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비가 내리듯 지지직거리던 자취방의 낡은 배불뚝이 TV 화면과, 자전거 뒷자리의 미소를 담아내느라 테이프가 늘어지던 그 거친 화면의 질감이 몹시도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혼자만의 감수성이 살아 숨 쉬던 영원한 청춘의 시각적 일기장 우리가 그토록 <첨밀밀>의 자전거 뒷자리에 열광했던 건, 단지 홍콩 멜로가 아름다워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수업이 없는 평일 낮, 방바닥에 홀로 엎드려 화면 속 남녀의 엇갈림에 가슴 졸이던 그 시절의 온도, 그리고 불안했지만 가장 순수하게 사랑의 기적을 믿었던 우리들의 20대 시절이 그 거친 화면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90년대 대학생이었던 저에게 <첨밀밀>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버텨내면 언젠가 운명 같은 순간이 찾아올 거라 위로해 주던 영원한 청춘의 일기장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