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kmdb |
1. 94년 대학가,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뒤늦게 마주한 홍콩 오락 영화의 정점
고등학생 시절이라 뒤늦게 봤던 영화, 주변 친구들이 무조건 보라고 입을 모았던 명작 <종횡사해>가 처음 개봉했던 1991년에 저는 입시 지옥에 갇혀 있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당시 극장가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상영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엄격한 학업 분위기 때문에 감히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쉬움을 삼킨 채 시간이 흘러 94년 대학생이 되었을 때, 과 동기들과 선배들은 "무겁고 비장한 느와르도 좋지만, 홍콩 영화의 진짜 세련된 맛을 보려면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입을 모아 강력하게 추천해 주었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좁디좁은 자취방, 친구들과 TV 화면 앞에 모여 앉아 결국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검은색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자취방으로 향했습니다. 두세 명이 누우면 발끝이 닿던 좁디좁은 자취방은 우리들의 완벽한 아지트였습니다. 퀴퀴한 냄새가 밴 노란 장판 바닥에 친구들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드르륵' 소리가 나던 배불뚝이 브라운관 TV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습니다. 싸구려 새우깡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재생 버튼을 누르던 그 순간, 낡은 TV 화면 속에서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유쾌하게 미소 짓는 주윤발, 장국영, 종초홍의 모습은 우리 대학생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2. 오우삼 감독의 파격적인 변신, 유쾌하고 세련된 케이퍼 무비
피 튀기는 복수극 대신 찾아온 낭만적인 도둑들의 세계 <종횡사해>는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으로 하드보일드 폭력 미학의 거장이라 불리던 오우삼 감독의 가장 유쾌하고 세련된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뒷골목의 복수극 대신, 전 세계를 무대로 명화를 훔치는 천재 예술품 도둑 3인조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90년대 케이퍼 무비(범죄 오락물)의 완벽한 교과서 삼총사가 삼면경의 치명적인 레이저 보안 장치를 아크릴판과 와이어를 이용해 가뿐하게 통과하는 장면이나, 훔친 명화를 들고 파리의 세느강 변을 질주하는 오프닝은 그야말로 세련미의 극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폭발하던 90년대 초반의 활기찬 에너지를 배경으로, 범죄마저 하나의 예술이나 축제처럼 즐기는 이 낭만적인 케이퍼 무비는 자취방 브라운관 TV 앞의 대학생들에게 신선한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선사했습니다.
3. 휠체어 댄스와 장국영의 케미, 아시아를 매료시킨 캐릭터의 미학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무도회 씬 이 영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은 단연 중반부 연회장에서 펼쳐지는 주윤발의 '휠체어 댄스'입니다. 작전 중 사고로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게 된 아조(주윤발)가 아름다운 아홍(종초홍)과 함께 음악에 맞춰 휠체어를 자유자재로 굴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비극적일 수 있는 상황마저 특유의 여유와 유머로 승화시키는 주윤발의 카리스마는 엄청났습니다.
장국영의 세련된 조율과 3인조의 완벽한 호흡 여기에 우수에 찬 눈빛으로 명화를 사수하는 아잠(장국영)의 세련된 액션과 감성적인 톤이 더해지면서 영화는 완벽한 균형을 이룹니다. 주윤발의 호탕한 매력과 장국영의 섬세함, 그리고 종초홍의 사랑스러움이 맞물린 삼총사의 케미스트리는 역대 홍콩 영화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현실의 팍팍함에 주눅 들어 있던 우리 청춘들에게, 이들이 뿜어내는 '멋짐'과 여유는 닮고 싶은 로망 그 자체였습니다.
4. 자취방 마당과 복도에서 친구들과 따라 했던 액션신
휠체어를 돌리고 손가락으로 카드를 날리던 그 시절 우리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이면, 과방이나 자취방 앞마당은 온통 종횡사해의 명장면을 따라 하는 친구들로 넘쳐났습니다. 특히 주윤발이 휠체어 바퀴를 스핀하며 적들을 교란하던 장면이나, 장국영이 카드와 와이어를 이용해 예술품을 낚아채던 세련된 액션신은 우리가 허구한 날 따라 하던 단골 레퍼토리였습니다. 바퀴 달린 사무용 의자에 앉아 친구가 뒤에서 밀어주면, 영화 속 주윤발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하거나, 트럼프 카드를 손가락으로 튕겨 날리며 낄낄대곤 했습니다.
어설픈 시늉 속에 담아두었던 청춘들의 해방구 문방구에서 산 비비탄 총이나 플라스틱 카드를 들고 슬로우 모션처럼 춤을 추듯 걷던 우리들의 모습은 참 우스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등을 맞대고 서로를 믿으며 "우리는 영원한 삼총사"를 외칠 때만큼은 진지했습니다. 학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꽉 막혀 있던 20대의 청춘들이, 영화 속 유쾌하고 세련된 액션을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며 가슴속 답답함을 털어내던 우리들만의 유쾌한 해방구였던 셈입니다.
5. 마무리 : 넷플릭스 시대에 다시 꺼내보는 낡은 비디오테이프의 감성
4K 초고화질이 대체할 수 없는 거친 질감의 그리움 요즘은 넷플릭스나 스마트폰 클릭 한 번으로 언제든 선명한 4K 초고화질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편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화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해졌고 화면은 눈부시게 선명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비가 내리듯 지지직거리던 자취방의 낡은 배불뚝이 TV 화면과, 휠체어 댄스 장면을 보느라 테이프가 늘어지던 그 거친 화면의 질감이 몹시도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유쾌한 낭만이 살아 숨 쉬던 영원한 청춘의 시각적 일기장 우리가 그토록 주윤발과 장국영의 멋에 열광하고 그 액션을 따라 했던 건, 단지 범죄 오락물이 신나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친구들과 좁은 방바닥에 둘러앉아 소주잔을 부딪치며 영웅들의 유쾌함을 논하고, 마당에서 의자를 굴리며 배가 아프도록 웃어대던 그 시절의 온도, 그리고 불안했지만 가장 순수하게 찬란했던 우리들의 20대 시절이 그 거친 화면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90년대 대학생이었던 저에게 <종횡사해>는, 아무리 힘든 현실 앞에서도 유머와 낭만을 잃지 말라며 환하게 웃어주던 영원한 청춘의 일기장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