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kmdb |
1. 1990년대 초반 비디오 대여점의 전성기와 안방극장으로 들어온 유럽의 낭만
배낭여행의 동경과 자취방을 채웠던 홍콩식 케이퍼 무비의 시각적 해방감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 이후, 1990년대 초반의 한국 대학가는 유럽 배낭여행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낭만이 싹트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청춘들은 당장 눈앞의 취업과 팍팍한 주머니 사정 탓에, 낡고 좁은 자취방에 모여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갈증 속에서 오우삼 감독의 <종횡사해>는 우중충한 홍콩의 뒷골목을 벗어나 예술과 낭만의 도시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삼으며 대중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았습니다.
미술관의 보안 시스템을 뚫고 명화를 훔쳐내는 세련된 도둑들의 이야기는, 비장하고 무거운 총격전에 지쳐있던 당시 관객들에게 엄청난 시각적 해방감을 선사했습니다.
자취방 브라운관을 통해 펼쳐지는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과 세 청춘의 유쾌한 범죄 행각은, 1990년대 초반 낭만을 꿈꾸던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 가장 완벽한 대리 만족의 텍스트였습니다.
2. 우아한 와이어 액션과 슬로우 모션이 빚어낸 총격 씬의 미학적 진화
폭력성을 낭만으로 치환한 오우삼 감독의 탁월한 미장센과 교차 편집
이 영화를 논할 때 영화사적으로 가장 빛나는 기술적 성취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우아한 무용처럼 연출해 낸 오우삼 감독 특유의 탁월한 카메라 워킹에 있습니다.
적외선 보안 레이저를 피하기 위해 와인잔을 굴리며 바닥을 미끄러지는 적두(장국영)의 도둑질 시퀀스는, 정교한 와이어 액션(Wire Action)과 유려한 롱테이크(Long-take)가 결합된 당대 최고의 시각적 명장면입니다.
특히 극 중 하반신 마비 연기를 하던 아해(주윤발)가 휠체어에 앉은 채로 홍두(종초홍)와 왈츠를 추는 '휠체어 댄스' 장면은, 인물들의 여유로운 미소와 우아한 회전 동작을 슬로우 모션(Slow Motion)으로 잡아내어 액션 영화 속에 로맨스의 숨결을 완벽하게 불어넣었습니다.
후반부 저택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총격전에서도 카드 날리기와 쌍권총 액션을 리드미컬한 교차 편집(Cross-cutting)으로 엮어내어, 잔혹한 살육전이 아닌 유쾌하고 세련된 활극의 미학을 팩트 기반으로 훌륭하게 증명해 냈습니다.
3. 무거운 느와르의 탈피와 아시아 유쾌한 도둑들 서사의 완벽한 정립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넘어선 세련된 케이퍼 무비 클리셰의 완성
<종횡사해>는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으로 대표되는 '영웅적 유혈주의(Heroic Bloodshed)'의 공식을 오우삼 감독 스스로가 유쾌하게 비틀고 해체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무거운 코트와 비장한 복수심 대신,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명화를 훔치는 유쾌하고 지적인 도둑들의 서사는 아시아 영화계에 '케이퍼 무비(Caper Movie)'라는 장르를 완벽하게 정립했습니다.
세 명의 매력적인 도둑들이 각자의 특기를 살려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치밀한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삼각관계의 로맨스는 이후 수많은 범죄 오락 영화들의 견고한 뼈대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제시한 경쾌한 팀플레이와 속고 속이는 반전의 내러티브는, 훗날 한국 영화 <도둑들>을 비롯한 수많은 아시아권 케이퍼 무비 제작자들에게 가장 완벽하고 교과서적인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4. <종횡사해> 단골 Q&A
Q. 영화 속 주윤발의 휠체어 댄스는 본인이 직접 연기한 건가요?
A. 네, 아해(주윤발)가 휠체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종초홍과 왈츠를 추는 이 전설적인 명장면은 어떠한 대역 없이 두 배우가 오랜 연습 끝에 직접 소화해 낸 결과물입니다.
현재 이 경쾌한 범죄 오락 영화의 클래식은 웨이브(Wavve)나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간편하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장국영이 부른 명품 OST의 선율과 와인잔이 깨지는 경쾌한 효과음을 제대로 즐기시려면, 다이소 블루투스 스피커(5,000원이면 방 안의 공간감을 채우기에 훌륭합니다)를 연결해 감상하시는 것을 가볍게 추천합니다.
5. 총성마저 낭만이 되던 시절, 빛나는 세 청춘이 남긴 아름다운 도둑들의 연대기
파리의 낭만과 낡은 자취방의 추억을 잇는 가장 유쾌하고 우아한 범죄극
<종횡사해>는 범죄를 다루고 총알이 빗발치는 액션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의 가슴속에 짙은 미소와 낭만을 남기는 마법 같은 작품입니다.
서로를 향한 끈끈한 의리와 양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던 세 청춘의 낭만적인 연대는, 돈과 배신이 난무하는 차가운 범죄 세계 속에서도 결코 색바래지 않는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파리의 좁은 골목을 질주하던 오픈카의 낭만과, 휠체어 위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음 짓던 주윤발의 넉넉한 미소는 시대를 초월해 관객들을 매료시킵니다.
낡은 자취방에서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돌려보며 파리의 낭만을 꿈꾸었던 그 시절 우리들의 찬란했던 청춘은, 스크린 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세 명의 매력적인 도둑들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박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