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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특유의 세기말적 공기와 방황하는 청춘의 서사를 서정적인 시선으로 포착해 낸 이 작품은 대만 영화의 거장 후효현 감독이 선보인 감각적이면서도 쓸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시점의 불안감과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는 젊은 영혼들의 일상을 푸르스름한 네온사인 불빛과 몽환적인 음악 속에 담아낸다. 화려한 대도시의 밤거리와 그 이면에 자리 잡은 지독한 외로움을 독창적인 화면 구성과 느린 호흡으로 파고들어 관객의 마음에 깊은 파문을 던진다.
푸른 터널 속을 걸어가는 비키의 몽환적인 오프닝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의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푸른 빛의 보행자 터널 장면은 한국의 2000년대 싸이월드 감성을 고스란히 적시던 상징적인 명장면이다. 주인공 비키가 담배를 손에 쥔 채 뒤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다가도 이내 쓸쓸한 표정으로 긴 터널을 걸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청춘의 유약한 심리를 대변한다. 슬로 모션으로 연출된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 위로 흐르는 몽환적인 전자음악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과 현재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카메라는 그녀의 등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대도시의 차가운 인공 조명과 한 인간이 지닌 고독한 공기를 대비시켜 묘사한다. 이 아름다운 도입부는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가 축복이 아닌,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미로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징후를 차분한 어조로 증명한다.
담배 연기와 테크노 비트 속에 부유하는 청춘들
비키와 그녀의 연인 하오하오가 공유하는 좁고 어두운 방은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서로를 옥죄고 상처 입히는 지독한 집착의 공간이자 현실 도피의 안식처다. 매일 밤 클럽의 자욱한 담배 연기와 귀를 찢는 듯한 테크노 비트 속에서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열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기보다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처연한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하오하오는 비키의 소지품을 뒤지고 그녀의 몸에 남은 다른 이의 흔적을 검사하며 소유욕을 불태우고, 비키는 이러한 숨 막히는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결심하면서도 이내 그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모순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화면은 인물들의 대화를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뿌연 연기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소품들을 통해 이들의 관계가 이미 회복 불가능한 균열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불빛들은 방황하는 청춘들이 마주한 차가운 현실의 벽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녀는 하오하오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면 그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매번 그 결심은 담배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개인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밀레니엄 맘보와 지독한 고독
필자에게 이 작품은 흘러간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단순한 청춘 영화를 넘어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근원적인 외로움과 관계의 덧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거울과 같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정착하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며 방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 중 비키가 보여주는 위태로운 발걸음과 서글픈 미소를 차마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기 어렵다. 우리는 흔히 젊음이라는 특권이 모든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젊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감정의 과잉과 고독이 얼마나 처연한지를 깨닫게 만든다. 2000년대 초반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차마 다 적지 못했던 밤의 우울과 감성들이 스크린 위로 고스란히 흘러넘치는 기분이 든다. 붙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인물들의 처지는 씁쓸하면서도 애틋하게 다가온다.
새하얀 눈밭 위의 흔적처럼 바래지 않는 서글픈 여운
극이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 대만의 후텁지근한 밤거리를 벗어나 일본 유바리의 새하얀 눈밭으로 공간이 전환되는 순간 관객은 묘한 해방감과 서글픔을 동시에 마주한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덮인 조용한 마을에서 비키가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는 장면은 팍팍했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를 마주하는 구원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펑펑 내리는 눈송이들은 그녀가 대만에서 겪었던 피비린내 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상처들을 묵묵히 덮어주며 인생이란 결국 스스로 고독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작품이 남긴 차분한 응시는 세월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아날로그적 생명력을 지니며 인물들의 화려한 겉포장 속에 숨겨진 날것의 슬픔을 들추어낸다. 차가운 얼음판 위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돌아서는 관객의 발걸음을 무겁게 붙잡으며 오랫동안 사유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