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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kmdb |
1. 90년대 대학가, 신입생의 풋풋함과 어색함이 공존하던 선배의 옥탑방
신입생 환영회의 어색함을 피해 도망친 봄밤 94년도 봄, 대학 문턱을 갓 넘은 94학번 새내기 시절이었습니다. 시끌벅적했던 신입생 환영회가 끝난 늦은 밤, 아직 서로 존댓말을 쓰며 어색해하던 동기 몇 명과 함께 우리는 선배의 옥탑방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번화가를 벗어나 도착한 좁은 옥탑방에는 아직 밤바람의 쌀쌀함이 맴돌았고, 우리는 얇은 담요 하나를 여럿이서 나눠 덮은 채 서먹함을 달래려 배불뚝이 브라운관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습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시작된 캘리포니아 드림 정적을 깨기 위해 선배가 먼지 쌓인 검은색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기계에 밀어 넣었습니다. 테이프가 빨려 들어가며 내는 '드르륵' 하는 기계음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향한 기대감을 부풀게 했습니다. 이윽고 화면이 밝아지고,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이 비좁은 옥탑방을 가득 채우는 순간, 어색했던 94학번 새내기들의 시선은 일제히 낡은 화면 속 어지러운 홍콩의 밤거리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2. 홍콩의 밤거리와 스텝 프린팅, 영상 미학의 새로운 기준
요즘 입문자들도 감탄하는 힙(Hip)한 감성의 원조 최근 레트로 열풍으로 홍콩 영화에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이 가장 놀라는 포인트이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이는 질문이 "이게 정말 90년대 영화 연출이 맞나요?"입니다. 당시 우리에게도 왕가위 감독의 '스텝 프린팅(인물의 움직임은 뚝뚝 끊기듯 느리게, 배경은 빠르게 흘러가게 만드는 기법)'과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엄청난 시각적 충격이었습니다. 피 튀기는 느와르 액션에만 익숙해져 있던 20대 청춘들에게, 이 감각적이고 세련된 영상미는 그 자체로 흉내 내고 싶은 거대한 로망이 되었습니다.
불안한 20대의 내면을 꿰뚫은 고독한 눈빛 화면 속 금성무(경찰 223)와 양조위(경찰 663)는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마음을 다치고, 복잡한 도시 속에서 철저히 고립된 채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이었습니다. 막 대학생이 되어 성인이라는 낯선 자유와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94학번의 우리들은, 그들의 텅 빈 눈빛 속에서 당시 청춘들의 보편적인 불안을 발견하며 깊은 감정적 동조를 느꼈습니다.
3. 파인애플 통조림과 젖은 걸레, 고독을 앓는 세련된 방식
유통기한 만 년, 오늘날에도 밈(Meme)으로 통하는 명대사 최근 유튜브 숏츠나 릴스 등에서도 자주 회자되며 요즘 세대에게도 꽤 익숙한 명장면이 있습니다.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유통기한이 자신의 생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던 금성무가 "내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고 독백하던 순간입니다. 사랑에 서툴고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스무 살들에게, 이 엉뚱하면서도 처절한 순애보는 가슴을 후벼 파는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낭만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물에 말을 거는 양조위를 보며 숨죽였던 우리들 하지만 브라운관 앞의 친구들을 가장 숨 막히게 했던 건, 옛 연인을 잊지 못해 훌쩍이는 젖은 걸레와 닳아버린 비누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양조위의 모습이었습니다.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며 실연을 견뎌내는 모습조차 어찌나 세련되고 아름답던지, 옥탑방에 모여 있던 동기들은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하고 그 완벽한 고독의 카타르시스에 온전히 빠져들었습니다.
4. 선배의 옥탑방 장판 위, 경찰 663을 어설프게 흉내 내던 동기들
걸레를 쥐고 사물에게 말을 걸며 터진 웃음보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옥탑방의 정적은 이내 유쾌한 장난기로 채워졌습니다. 한 동기가 화장실에서 덜 짜낸 젖은 걸레를 들고나와 바닥에 뚝뚝 물을 떨어뜨리며 "너 왜 이렇게 울고 있니?"라며 양조위 흉내를 냈고, 그 어설픈 흉내에 방 안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최근 OTT로 이 영화를 혼자 감상하는 분들은 쉽게 느끼기 힘든, 여럿이 좁은 방에 모여 있을 때만 터져 나오는 유쾌한 에너지였습니다.
어설픈 장난 속에서 허물어진 신입생들의 풋풋한 벽 누군가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찾아야 한다며 선배의 찬장을 뒤적거렸고, 우리는 선글라스를 낀 임청하처럼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낄낄댔습니다. 영화 시작 전까지만 해도 쭈뼛거리며 존댓말을 쓰던 94학번 동기들은, 장판 위를 뒹굴며 영화를 흉내 내는 그 장난 속에서 어느새 마음의 벽을 허물고 끈끈한 우정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5. 마무리 : 넷플릭스 시대에 다시 꺼내보는 낡은 비디오테이프의 감성
4K 초고화질이 대체할 수 없는 거친 질감의 그리움 스마트폰 앱을 열고 클릭 한 번이면 언제든 선명한 4K 초고화질로 <중경삼림>의 화려한 색감을 감상할 수 있는 편리한 시대입니다. 화질과 음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해졌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비가 내리듯 지지직거리던 선배 옥탑방의 낡은 배불뚝이 TV 화면과, 몽환적인 연출을 담아내느라 묘하게 늘어지던 그 거친 비디오테이프의 질감이 몹시도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유통기한 없는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영원한 청춘의 일기장 우리가 그토록 이 영화의 흔들리는 영상에 열광했던 건, 단지 연출이 세련되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94년도 봄날, 어색함을 안고 모여 앉았던 옥탑방에서 살을 맞대고 한 화면을 응시했던 그 시절의 온도, 그리고 밤새워 어설픈 장난을 치며 아무런 걱정 없이 순수하게 우정을 나누던 우리들의 스무 살이 그 거친 화면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내기 시절의 우리에게 이 영화는, 풋풋했던 동기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20대의 낭만을 유통기한 없이 보관해 둔 찬란한 청춘의 일기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