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과 왕조현의 <천녀유혼>(1987): 동아리방 브라운관을 뚫고 나온 매혹적인 귀신과 청춘들의 밤샘

 

장국영과 왕조현의 <천녀유혼>(1987): 동아리방 브라운관을 뚫고 나온 매혹적인 귀신과 청춘들의 밤샘
출처 : kmdb

1. 1980년대 후반의 낭만과 밤을 지새운 동아리방의 브라운관

최루탄 연기 걷힌 대학가를 매혹시킨 불멸의 판타지 로맨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한국 대학가는 민주화의 뜨거운 열기와 낭만이 교차하던 역동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동아리방(동방)은 선후배들이 모여 밤새 토론을 하거나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청춘들의 아지트였고, 한구석에 놓인 낡은 VCR과 볼록한 브라운관 TV는 밤샘 작업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최고의 오락 기기였습니다.

홍콩 느와르의 총소리가 지겨워질 무렵, 누군가 빌려온 <천녀유혼> 비디오테이프는 퀴퀴한 동아리방의 공기를 순식간에 몽환적인 안개 낀 숲속으로 뒤바꿔 놓았습니다.

무섭고 기괴한 원귀가 아닌,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청초한 미모로 남자를 유혹하는 귀신 섭소천(왕조현)의 등장과, 순박하고 어리숙한 서생 영채신(장국영)의 애절한 로맨스는 당시 청춘들에게 엄청난 시각적, 정서적 충격을 안겼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브라운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두 사람의 닿을 듯 말 듯 한 사랑을 숨죽여 지켜보던 그 밤은, 시대를 통과한 젊은이들에게 가장 매혹적인 첫사랑의 기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2. 푸른 조명과 와이어 액션이 빚어낸 몽환적 미장센의 극치

특수효과와 극단적 클로즈업으로 완성한 요괴 무협의 시각화

이 영화를 논할 때 영화사적으로 가장 탁월한 기술적 성취는, 정소동 감독과 제작자 서극이 빚어낸 혁신적인 와이어 액션(Wire Action)과 몽환적인 조명(Lighting) 연출입니다.

영화 내내 난약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와 차가운 푸른빛의 달조명(Blue Lighting)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관객을 환상적인 세계로 이끕니다.

특히 소천이 날아다니며 흰 천을 뻗어 적을 공격하거나 영채신을 감싸는 장면은,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협 액션을 한 편의 아름다운 고전 무용처럼 승화시켰습니다.

또한 물이 가득 찬 목욕통 속에 영채신을 숨기고 소천이 입맞춤으로 숨을 불어넣어 주는 전설적인 수중 키스 씬은, 두 사람의 젖은 머리카락과 흔들리는 눈빛을 극단적인 클로즈업(Extreme Close-up)과 슬로우 모션(Slow Motion)으로 포착하여 동양 판타지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관능과 서정성의 정점을 팩트 기반으로 훌륭하게 보여주었습니다.

3. 홍콩 SF 환상 무협의 장르적 개척과 범아시아적 신드롬

느와르를 밀어낸 퓨전 로맨스와 불세출의 스타 탄생

<천녀유혼>은 피비린내 나는 폭력물 일색이던 홍콩 영화계에 'SF 환상 무협(Fantasy Martial Arts)'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상업 장르를 개척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인간과 귀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설화를 바탕으로, 현란한 무협 액션과 호러, 그리고 눈물겨운 멜로드라마를 완벽한 비율로 배합한 이 영화는 범아시아적인 거대한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왕조현은 이 한 편의 영화로 아시아 전역의 남성들을 열광시키는 최고의 여신으로 등극했으며, 장국영 역시 기존의 반항아 이미지를 벗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순수한 청년의 아이콘으로 완벽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 영화가 제시한 요괴와 인간의 애절한 로맨스 클리셰는 이후 <화피> 등 수많은 중화권 판타지 영화와 드라마의 가장 확고한 서사적 교본이 되었습니다.

4. <천녀유혼> 단골 Q&A

Q. 인간과 귀신의 사랑을 다룬 이 이야기는 창작된 각본인가요?

A. 아니요, 이 영화는 청나라 초기 소설가 포송령이 기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집필한 고전 괴기 소설집 <요재지이(聊齋誌異)> 중 '섭소천' 에피소드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극과 정소동 감독은 이 짧고 고전적인 문어체 원작에 와이어 액션과 현대적인 멜로 감성을 덧입혀 가장 세련된 현대적 블록버스터로 재탄생시켰습니다.

5. 아침 햇살과 함께 사라진 가장 아름답고 애절한 밤의 기억

동이 터오는 동아리방 창문 틈으로 밀려들던 먹먹한 슬픔의 텍스트

<천녀유혼>은 화려한 요괴들과의 전투 끝에 결국 피할 수 없는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가장 슬픈 이별 공식의 텍스트입니다.

동이 트면 뼛가루 단지 속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소천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려는 욕심을 누르고 다급하게 햇빛을 가리던 영채신의 처절한 몸부림은 관객의 눈물샘을 무자비하게 자극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동아리방의 작은 창문 틈으로 희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어올 때, 밤새 브라운관을 지켜보던 청춘들은 마치 한바탕 길고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난 듯한 깊은 상실감과 먹먹함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낡은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우리들 가슴속에 찾아왔던 매혹적인 귀신과 순수한 서생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시대가 변해도 결코 퇴색되지 않는 영원한 첫사랑의 판타지로 선명하게 박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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