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삼의 <영웅본색>(1986): 첫 학점의 충격을 안고 모인 옥탑방, 바바리코트와 성냥개비의 낭만에 취하다

 

오우삼의 <영웅본색>(1986): 칼바람 불던 겨울 옥탑방, 작은 전기난로 앞에서 불타오른 사나이들의 바이블
출처 : kmdb

1. 1980년대 후반 대학가의 옥탑방, 씁쓸한 현실을 달래주었던 수컷들의 낭만

첫 학점의 좌절을 잊게 만든 뒷골목 영웅들의 뜨거운 의리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학 생활의 낭만을 꿈꾸던 신입생들에게 첫 학기 성적표는 씁쓸하고도 잔혹한 현실의 첫맛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학점의 충격과 밀려오는 자괴감을 안고 동기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던 곳은, 겨울이면 외풍이 스며들고 여름이면 숨이 턱 막히던 허름한 옥탑방이었습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팍팍한 현실을 한탄하던 그 밤, VCR 브라운관을 통해 흘러나온 <영웅본색>은 방황하던 청춘들의 가슴에 거대한 불을 지폈습니다.

세상의 잣대나 학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롱 바바리코트를 자락을 휘날리며 성냥개비를 질근질근 씹는 마크(주윤발)의 여유로운 미소는 그 자체로 엄청난 시각적 해방감이었습니다. 배신과 몰락 속에서도 끝까지 형제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내들의 비장한 서사는, 좌절감에 빠져 있던 옥탑방의 청춘들에게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가장 뜨겁고 순수한 낭만의 세계로 안내했습니다.

2. 슬로우 모션과 트윈 권총이 창조해 낸 현대적 무협의 미학

풍림각 총격 씬, 폭력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혁명적 카메라 워킹

이 영화를 논할 때 영화사적으로 가장 기념비적인 기술적 성취는, 고전 무협 영화의 칼싸움을 현대적인 총격전으로 완벽하게 치환해 낸 오우삼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입니다.

그 정점을 보여주는 대만 '풍림각(楓林閣)' 총격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복수를 위해 화분 속에 미리 숨겨둔 권총을 꺼내 들고 적들을 처단하는 마크의 동선을 따라 매끄럽게 유영합니다. 피가 튀고 유리창이 박살 나는 찰나의 순간들을 극단적인 슬로우 모션(Slow Motion)으로 길게 늘어뜨려, 폭력을 한 편의 처절하고 우아한 무용처럼 묘사했습니다.

양손에 총을 쥐고 불을 뿜는 이른바 '트윈 권총(Dual Wielding)' 액션은 무협지의 절대 내공을 시각화한 것과 같았으며, 비트가 강한 전자음악과 탄피가 떨어지는 효과음을 리드미컬한 교차 편집(Cross-cutting)으로 엮어내어 아시아 액션 영화의 새로운 문법을 팩트 기반으로 완벽하게 정립했습니다.

3. '홍콩 느와르'의 탄생과 아시아 전역을 휩쓴 거대한 문화적 신드롬

영웅적 유혈주의의 효시이자 시대의 아이콘이 된 마스터피스

<영웅본색>은 아시아 영화사에서 단일 작품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 현상이자 '홍콩 느와르(Hong Kong Noir)'라는 독자적인 장르를 탄생시킨 위대한 시발점입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현대 사회의 뒷골목에 '의리'와 '복수'라는 고전적 가치를 주입한 오우삼표 '영웅적 유혈주의(Heroic Bloodshed)'는 이 작품을 통해 완벽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메가 히트 이후, 아시아 전역의 거리에는 계절을 불문하고 롱 바바리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성냥개비를 입에 문 청춘들로 넘쳐났습니다.

또한 암흑가에서 발을 빼려는 형 송자호(적룡)와 경찰이 된 동생 송아걸(장국영) 사이의 엇갈린 운명은 피비린내 나는 액션 속에 짙은 멜로드라마의 정서를 부여하며, 이후 십여 년간 아시아 박스오피스를 지배하게 될 무수한 홍콩 갱스터 영화들의 가장 완벽한 서사적 교본이 되었습니다.

4. <영웅본색> 단골 Q&A

Q. 주윤발(마크)이 처음부터 영화의 메인 주인공이었나요?

A. 아닙니다. 기획 당시 <영웅본색>의 메인 주인공은 적룡(자호)과 장국영(아걸) 형제였으며, 주윤발이 맡은 '마크' 역은 서사를 돕는 조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촬영에 돌입한 후 주윤발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캐릭터 해석에 매료된 오우삼 감독이 현장에서 그의 비중과 대사를 대폭 늘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연이었던 마크는 영화의 상징을 넘어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5. 브라운관을 적셨던 '당년정',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의 찬가

가짜 돈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던, 그 허세롭고 찬란했던 밤의 기억

"신이 뭔지 아나? 바로 나야. 자기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신이지."

홍콩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마크가 읊조리던 이 비장한 대사는, 첫 학점의 실패와 불투명한 미래로 흔들리던 옥탑방 청춘들의 척박한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위조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던 그의 모습은 팍팍한 자본주의 현실을 향한 가장 낭만적이고 유쾌한 반항이었습니다.

영화의 엔딩, 피투성이가 된 형제의 화해 위로 장국영이 부른 애절한 주제곡 '당년정(當年情)'이 흐를 때, 브라운관 앞의 청춘들은 숨죽여 뜨거운 눈물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옥탑방의 친구들은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고 빛바랜 성적표의 기억도 희미해졌지만, 바바리코트 깃을 세운 채 절룩거리며 걸어가던 주윤발의 뒷모습과 의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던 그 시절의 낭만은 우리들의 가장 찬란했던 영웅본색으로 영원히 박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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